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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문제에 대해 좀 더 논해보겠다. 최선의 인간[각주:1]을 선별해서 이들에게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줘야 할까? 최선의 인간이란 존재하긴 하는가? 지구상 단 한 명에게만 이 권리가 주어진다면, 이는 오히려 무간지옥에 빠뜨리는 벌이 되지 않는가?[각주:2]

선별의 어려움과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영생할 권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느낄 박탈감과 분노이다. 권리 부여가 선량한 사람임을 인증하는 마크라면, 뒤집어 보아 권리 없는 자들은 선량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불만만 품고 그치기엔, 영생이 지닌 편익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므로 불만은 강탈이나 소요 사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특히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잠시도 주저하지 않는 쓰레기일수록 권리 강탈에 혈안이 된다.[각주:3]

그러므로 최선의 인간에게만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악의 인간에게만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이 영생자가 서서히 등장할 과도기적인 사회에서 채택할 대안으로 보인다.[각주:4] 한마디로 수명연장 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범위가 규제로 제한될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이는 그저 최악의 사태만 피할 뿐, 사회에 나타날 불만을 일소하는 방안은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에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들, 자신을 괴롭힌 적이 있는 사회의 잠재적인 암에게도 권리가 부여된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친다는 건 지극히 어렵다. 가증스런 위선으로 무장한 기회주의자가 영생을 누리며 쌓아갈 죄악은 최악의 사태와 차악의 사태 간의 차이가 미미해보일 정도로 극악무도할 수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범죄 전력이 전혀 없으며, 이웃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아무개가 실제로는 집에서 몰래 감염 위험이 높은 치사성 바이러스를 합성해서 퍼트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치자. 영생자가 되기 전에는 얌전했던 그가 영생자가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 끔찍한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퍼트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각주:5] 결국 역학조사와 국제공조수사로 잡혀 처벌받는다고 하자. 불의를 단죄하고 정의를 세웠으니 감옥에 가두고 끝낼 수 있는 일인가? 영원히 아무개를 감옥에 가둔들, 이게 피해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영원히 가두는 거라면 아무개가 재범을 일으킬 여지가 없어지더라도, 만에 하나 징역 20년에 그친다면, 아니 설령 100보 양보해서 죄질의 무거움을 고려하여 징역 200년에 처하더라도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아무개는 학살자로 다시 악명을 떨칠 여지가 극도로 높다. 재범으로 감옥에 2,000년을 가둬도 아무개에겐 사실상 무의미한 처벌이 되어버린다. 사회가 할 수 있는 단죄란, 무기징역이나 사형, 그리고 도저히 탕감할 수 없는 막대한 벌금이 된다.[각주:6]

  1. 「최선」은 「완벽」과는 다르다. 완벽한 인간은 아무 결점이 없다. 이런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을 감화하며, 명석한 두뇌로 맡은 역사적 소임을 모조리 완수하는 초인일지라도 춤을 못 출 수도 있는 법이다. 최선의 인간은 여러 결점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사는 동안 선량하려고 애쓰며, 한편으론 실제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선택만큼은 피해온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완벽한 인간에 못 미치더라도 최선의 인간 또한 보통 사람에게는 되기 어려운 목표다. 사람은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데, 때로는 이런 실수가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면 그는 최선의 인간이 아니게 된다. 딱히 심각한 악인도 아닌데 세상의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는 사람도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 줄어들지 않는 잔업에 시달리다가 방사능 누출 사고를 터트렸다고 치자. 과연 이 핵발전소에서 근무하던 사람만이 모든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과만 따지면, 여기 근로자는 최선의 인간이 아니게 된다. 꼭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변 여건 때문에 최선의 사람이 아니게 된다. [본문으로]
  2. 이 사람이 알던 지인은 이르든 늦든 모조리 세상을 떠날 것이므로 영생자는 낯선 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물론 살다 보면, 낯선 이와도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친해진 이들도 떠난다. 이를 계속 반복한다. 언제까지? 영생자 혼자 세상에 남을 때까지 혹은 영생자가 스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래도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영생을 못 겪어봤으므로 장담한 대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본문으로]
  3. 영생을 위한 방식이 일회적이라면 피할 수 있지만, 주기적인 약물 복용이거나 주기적인 시술일 경우 문제는 극도로 심각해진다. [본문으로]
  4. 그런데 여기서도 최악의 인간의 범주가 문제가 된다. 세상에는 학살자나 연쇄살인마처럼 최악의 인간이라고 손쉽게 판단할 수 있는 케이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범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부도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어떤가? 우리는 인터넷을 하다 보면, 거의 매일 그런 인간언저리에 걸쳐 있는 괴물을 보게 된다. 괴물의 마음을 가진 자는 구제할 수 없는 최악의 인간이 아닌가? [본문으로]
  5. 이익을 바라지 않고 단지 학살이 좋아서, 혹은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여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익을 노린 경우 아무개는 훨씬 더 구제불능 쓰레기가 된다.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 세상에 퍼져서 혼란이 가중될 때 바이러스와 관련된 정보를 백신 회사에 조금씩 팔면 금세 떼돈을 벌 수 있다. 사람들이 더욱더 많이 감염될수록 아무개가 벌어들일 이익은 더욱더 커지게 되는데, 벌어둔 돈을 은행에 몽땅 집어넣고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 은행이 파산하지 않는 한 복리로 재산이 생겨버린다. 따라서 단 한 푼의 이익도 챙길 수 없도록 부당이득을 모두 몰수하고 막대한 벌금을 매겨야 한다. [본문으로]
  6. 사례로 든 죄과를 범한 자는 교화를 통해서 사회에 돌려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나는 여긴다. 교화가 불가능한 범죄자에게 가해질 처분은 결국 단죄뿐인 셈인데, 만약 어떻게든 단죄를 포기하고 교화를 시도한다면 도저히 전미(展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적 제재를 가하려 할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Posted by Nushi
:

 영생을 누릴 자격은 중요한 문제로 떠올라야 한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다면 영생을 누릴 권리도 그러한가? 돈만 내면 누구나 영생을 누려야 하는가? 영생에서 비롯되는 문제 중 하나는 악인의 영원불멸일 것이다. 이는 정치가 몇 명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음모론을 신봉하는 적지 않은 사람이 일으킬 문제의 수준이 진짜 경악할 문제다. 진지한 음모론자는 음모론을 철저히 검증하지 않은 채, 이를 참이라는 전제를 깔고 행동에 옮기기에 큰 골칫거리가 된다.[각주:1] 그런 사람들이 테러를 벌인다면, 다 잡혀 들어가거나 어떤 식으로든 표적이 되어 죽을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그런 즉각적인 행동이 아니다. 영생하는 진지한 음모론자가 꾸밀 진정한 음모는 합법적인 과정을 통한 음모론 전파 및 양성이며, 이는 정치 논리가 음모론에 잠식되어가며 민주주의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음모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지나간 일에 대한 음모론과 그렇지 않은 음모론.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인류가 달에 간 적이 없다는 음모론은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다. 지구 밖으로 나가면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인할 수 있고, 달에 간 인류의 흔적도 볼 수 있다.[각주:2] 지구 밖으로 나가는 게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라 이런 음모론 반박에는 가장 확실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지구가 평평하다면 바다의 수평선 너머에 육지가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바닷물만 보인다. 지구가 평평하다면 육지나 바다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끝은 없으므로 영원히 알 수 없다. 달의 경우에는 나사 홈페이지에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지나간 일, 즉 과거에 대한 음모론은 어떤가. 요새는 많이 인식이 바뀌었다지만,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고, 명성황후는 떳떳한 조선의 국모라는 식의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나마 이런 헛소문은 반박할 자료가 남아 있어서 인식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자료가 유실되어버릴 경우, 제멋대로 폭주하는 망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얼마나 많은 자료가 온존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미치광이의 세상을 파탄 낼 아이디어는 흉포하게 모두의 인식을 할퀴어 갈기갈기 찢는다. 자신이 신봉하는 음모론이 참이며, 반박하는 자료가 세상을 참람스럽게 혼돈에 빠뜨린다고 여겨 취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자료의 멸진이다. 그리하여 자기 좋을 대로 꾸민 음모론을 끊임없이 퍼트린다. 언제까지? 어차피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있는데 그야 음모론 확산에 성공할 때까지다.[각주:3]

 어떤 사람들은 이를 기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물론 기우에 그치는 게 가장 좋다. 그러나 세상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가 의외로 많다. 그래도 이를 기우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자신들의 망상을 관철할 행동력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에 만연하는 온갖 역사왜곡을 보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세상은 위기라고 봐야 한다. 심지어 이런 역사왜곡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 단위에서 장려 내지 방치되고 있다.

 사람은 제멋대로 믿고 싶어서 망상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고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영생이란 두려운 것이며,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이해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다. 을사오적이 여태 살아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니, 그들은 누가 봐도 역적이자 매국노 아닌가? 아무도 역적을 환영할 리가 없다.” 과연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세태로 미루어 보아, 을사오적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분명 이들에게 추종자가 있으리라 장담한다.

 굳이 을사오적이 아니더라도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자가 영생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반역을 꿈꾸는 역적도당이 세력을 불리며 진보된 기술과 현란한 선동으로 「영원한 군림」을 노린다면, 이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각주:4] 철저한 학살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모든 선거를 폐지하여 반발의 싹을 짓밟아 없애려 한다면, 영생은 그저 끔찍한 지배를 낳은 저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영생을 보장하는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이는 매우 제한적으로 조심스럽게 보급되어야 한다.


자꾸 영생영생거리니까 사이비 같아 보이는데, 영원한 삶이라고 늘여쓰기 귀찮으니 어쩔 수 없다.

순서를 맞추려고 하지만,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메모니.

  1. 물론 음모론 신봉자로 보이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신봉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구가 둥근 줄 뻔히 알면서 “지구는 평평해!”라고 지껄이다가 누가 열변을 토하며 반박하면 “사실 나도 지구가 둥근 줄 알아. 단지 네 반응이 웃겨서 그랬을 뿐이야.”라고 히죽거리는 부류의 인간 말이다. 정말 한 대 치고 싶겠지만, 진지한 음모론 신봉자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앞서 언급된 장난치는 거짓(?) 음모론자도 진짜 음모론자를 만나면 금세 진지해질 수 있다. 음모론자의 격은 아무리 논파된 명제라도 참이라고 박박 우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가짜 음모론자의 경우 거짓 명제를 참이 아니라고 알면서 농담하는 것이지만, 진짜 음모론자의 경우 거짓 명제에 가해진 모든 반박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하다고 여긴다. [본문으로]
  2. 물론 아주 먼 미래에는 달에 찍은 발자국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쯤이면 인류가 지구에 살긴 할까? [본문으로]
  3. 이를 방어하는 방법은 비용이 꽤 들더라도 자료의 사본을 꾸준히 만들어 여기저기 퍼트리면서 원본은 대중이 모르는 장소에 은닉하는 것이다. 설령 사본이 몇 개 없어져도 사본을 계속 만들 수 있다면 미치광이 음모론자의 계획은 막을 수 있다. 원본은 어디에 두는 게 가장 안전할까? 아무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텅 빈 곳, 즉 우주 최대 공허가 안전성만 따지자면 제일일 것이다. [본문으로]
  4. 나는 이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지키기 어렵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생산성을 증진시키고 삶을 더 윤택하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디스토피아로 다가설 가능성 또한 증가시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Nushi
:

 오래 살고자 하는 욕구, 불로불사 내지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은 먼 옛날부터 허무맹랑하게 여겨졌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하는 갈망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나머지, 그가 이룩한 중국 통일이라는 위업은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망국의 길로 접어들이 빛이 바랬다. 이보다 더 오래 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영생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늘 그렇듯, 실패로 귀결된다.

 영생, 불로불사, 불로장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이를 바라는 인간의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된다. 이 씁쓸한 결말은 우리에게 영생 따위는 바라지도 말라는 낡은 교훈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껏 영생에 성공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인구가 80억을 목전에 둔 이 순간에도.

 그러나 통계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영아사망률은 놀라울 만큼 낮아졌고, 기대수명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 아니, 이런 표현을 접하면서 뭐 이런 호들갑이 다 있나 싶을 사람도 있겠지만, 통계에 나온 수치를 보면 진짜 극적인 변화라는 게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세계은행에 의하면 1960년에 약 55세에 지나지 않던 기대수명이 2017년에는 약 83세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더 기대수명이 늘어날 것이다. 기대수명의 한계는 언제일까? 여기서 우리는 기나긴 삶이 빚는 문제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물론 여전히 영생이란 요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생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삶과 죽음에 관한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어진다.

 사실 나는 오래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오래 사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오래 못 사는 사람이 삶을 연장시키는 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고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이라는 문제에서 오래 사는 것이 우위에 선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삶에 수반되는 각종 문제에 더 오래 직면하게 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생존에 수반되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리라. 게다가 그런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삶이 쉽게 지루해지지 않겠냐는 두려움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모든 이에 대하여 무한대는 아닌 모양이다. 수명을 재화라고 치부하기는 어렵겠지만, 의약품을 소비하거나 의료 서비스를 받는 등 삶을 더 연장시키는 데에 들이는 노력을 수명 1[각주:1] 연장에 대한 대가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수명에 관한 한계비용이라고 치자. 이렇게 늘린 수명 1년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이 편익이라면 이를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이라 간주해도 되지 있을까. 한계편익이 무한대라면, 한계비용이 어떻든 간에 재화를 무한대로 소비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이 무한대라면, 게다가 수명을 무한대로 늘릴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원히 살려고 발악하려는 게 정상일 것이다. 진시황의 경우, 그는 살면서 온갖 것을 다 이뤄봤기 때문에, 남은 욕망이 수명 늘리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사실상 무한대였던 셈이다. 설령 무한대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수명에 관한 한계비용보다는 아득히 높았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이에 대하여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무한대가 아닌 듯하다. 무한히 사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두려움은 비이성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영생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 그만큼 위험에 마주할 확률이 점증하는 셈이다. 쌓아놓은 재산이, 업적이, 명예가 많을수록 잃어버릴 재산도, 업적도, 명예도 많아진다.

 지금까지 말한 방식처럼 장생에 대한 장단점은 핑퐁처럼 주고받는 항목의 연속처럼 보인다. 여기에 어느 항목에 중점을 둘 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판단이다. 이는 영생을 가능케 할 기술이 현실에 출현하더라도 모두가 이 기술을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선택의 우위가 있으므로 오래 살기를 선택할 사람이 많다고 본다.

 여기서 확실히 해둬야 할 점은, 영생이 그저 늙더라도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하여 그저 죽지만은 않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젊은 상태를 무한히 유지함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교해보자. 100세의 신체 나이로 1,000년을 사는 것보다 20세의 신체 나이로 100년을 사는 편을 대체로 더 선호하리라고 본다.[각주:2]

 


과연 끝맺을 수 있는 글이긴 할까나...

한계편익이냐, 한계효용이냐, 그것이 헷갈린다.

티스토리 좀 뭔가 많이 바뀐 듯.......?

  1. 반드시 1년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늘리는 것보다 1년 늘리는 편이 의료비 지출을 늘리는 심리적인 정당성을 더 쉽게 확보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를 더 살기 위해 1억 원을 지출하는 것보다 1년을 더 살기 위해 365억 원을 지출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루에 지출하는 절대적인 액수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1년 더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액수 이외의 것을 고려한다면 하루 더 사는 것과 1년 더 사는 것에 들이는 하루 평균 지출액이 절대적으로 같더라도 둘의 실질적인 가치는 다르다. 하루의 경험보다 1년의 경험이 더 많은 데다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연속성은 상당히 중요한데, 소설 한 권을 온전히 읽는 게 소설 한 챕터만 읽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20분 볼 수 있는 권리로 쪼개 판다면, 누가 그렇게 쪼개진 영화를 보려고 할까? 조각난 재화보다 하나의 온전한 재화가 우위에 있듯이 마지막으로 살 하루보다 마지막으로 살 1년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에 대한 선호가 그렇듯, 수명에 대한 선호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시한부 인생임에도 어떤 식으로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가온 죽음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1,000년 사는 동안 겪을 온갖 경험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설령 신체 나이가 젊지 않더라도 무조건 오래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노화로 인해 몸이 고통스러워도 1,000년 동안 수많은 만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소설, 음악, 스포츠 경기, 정치변동, 환경변화, 기타 등등을 즐기고 섭렵하는 데에 느끼는 기쁨이 앞선다면 장생에 따르는 노화라는 대가를 충분히 치를 만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N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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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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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이 소설을 쓸 때 생각해 둔 (나름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사실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지요.

이 블로그에는 2013년에 간략히 소설 설정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세계관의 핵심에는 비밀 결사 단체가 있고, 몇 가지 사건들이 터진다는 거죠.

그 사건 중에는 한국의 대규모 두뇌 유출 사건(이공계 출신 엔지니어, 과학자들이 대규모로 국외 이탈)이 포함됩니다.[각주:1]

아.. 2010년은 물론이고 2013년에도 별로 현실성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오유 과학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니 우려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나보더군요.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52877

[속보] "이공계 병역특례 2023년까지 폐지"

혜택을 더 줘도 모자랄 판에 있는 제도마저 폐지시키려 합니다.

해당 기사에 의하면 '병역특례제도를 2023년까지 전면 폐지키로 결정했다'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예비군 개밥 사건이니, 방산 비리, 각종 사건들로 국방부는 오명을 얻은 판국에 아예 막가자는 건지 궁금하네요.

댓글에는 국내 대학원 진학 포기가 속출하고 있는 듯합니다.

기초 과학이 부실하다고 말만 그러지, 막상 제대로 육성시킬 생각은 없어보입니다.

  1. http://ejqspdb.tistory.com/4 [본문으로]
Posted by N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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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벙커용으로 방치된 블로그

중요 자료만 따로 저장하기로 결정.

주요 거점으로는 기각.

본진 주소는 알려줄수 없다!


Posted by N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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