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자 하는 욕구, 불로불사 내지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은 먼 옛날부터 허무맹랑하게 여겨졌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하는 갈망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나머지, 그가 이룩한 중국 통일이라는 위업은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망국의 길로 접어들이 빛이 바랬다. 이보다 더 오래 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영생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늘 그렇듯, 실패로 귀결된다.

 영생, 불로불사, 불로장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이를 바라는 인간의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된다. 이 씁쓸한 결말은 우리에게 영생 따위는 바라지도 말라는 낡은 교훈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껏 영생에 성공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인구가 80억을 목전에 둔 이 순간에도.

 그러나 통계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영아사망률은 놀라울 만큼 낮아졌고, 기대수명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 아니, 이런 표현을 접하면서 뭐 이런 호들갑이 다 있나 싶을 사람도 있겠지만, 통계에 나온 수치를 보면 진짜 극적인 변화라는 게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세계은행에 의하면 1960년에 약 55세에 지나지 않던 기대수명이 2017년에는 약 83세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더 기대수명이 늘어날 것이다. 기대수명의 한계는 언제일까? 여기서 우리는 기나긴 삶이 빚는 문제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물론 여전히 영생이란 요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생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삶과 죽음에 관한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어진다.

 사실 나는 오래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오래 사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오래 못 사는 사람이 삶을 연장시키는 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고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이라는 문제에서 오래 사는 것이 우위에 선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삶에 수반되는 각종 문제에 더 오래 직면하게 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생존에 수반되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리라. 게다가 그런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삶이 쉽게 지루해지지 않겠냐는 두려움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모든 이에 대하여 무한대는 아닌 모양이다. 수명을 재화라고 치부하기는 어렵겠지만, 의약품을 소비하거나 의료 서비스를 받는 등 삶을 더 연장시키는 데에 들이는 노력을 수명 1[각주:1] 연장에 대한 대가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수명에 관한 한계비용이라고 치자. 이렇게 늘린 수명 1년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이 편익이라면 이를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이라 간주해도 되지 있을까. 한계편익이 무한대라면, 한계비용이 어떻든 간에 재화를 무한대로 소비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이 무한대라면, 게다가 수명을 무한대로 늘릴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원히 살려고 발악하려는 게 정상일 것이다. 진시황의 경우, 그는 살면서 온갖 것을 다 이뤄봤기 때문에, 남은 욕망이 수명 늘리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사실상 무한대였던 셈이다. 설령 무한대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수명에 관한 한계비용보다는 아득히 높았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이에 대하여 수명에 관한 한계편익은 무한대가 아닌 듯하다. 무한히 사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두려움은 비이성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영생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 그만큼 위험에 마주할 확률이 점증하는 셈이다. 쌓아놓은 재산이, 업적이, 명예가 많을수록 잃어버릴 재산도, 업적도, 명예도 많아진다.

 지금까지 말한 방식처럼 장생에 대한 장단점은 핑퐁처럼 주고받는 항목의 연속처럼 보인다. 여기에 어느 항목에 중점을 둘 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판단이다. 이는 영생을 가능케 할 기술이 현실에 출현하더라도 모두가 이 기술을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선택의 우위가 있으므로 오래 살기를 선택할 사람이 많다고 본다.

 여기서 확실히 해둬야 할 점은, 영생이 그저 늙더라도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하여 그저 죽지만은 않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젊은 상태를 무한히 유지함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교해보자. 100세의 신체 나이로 1,000년을 사는 것보다 20세의 신체 나이로 100년을 사는 편을 대체로 더 선호하리라고 본다.[각주:2]

 


과연 끝맺을 수 있는 글이긴 할까나...

한계편익이냐, 한계효용이냐, 그것이 헷갈린다.

티스토리 좀 뭔가 많이 바뀐 듯.......?

  1. 반드시 1년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늘리는 것보다 1년 늘리는 편이 의료비 지출을 늘리는 심리적인 정당성을 더 쉽게 확보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를 더 살기 위해 1억 원을 지출하는 것보다 1년을 더 살기 위해 365억 원을 지출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루에 지출하는 절대적인 액수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1년 더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액수 이외의 것을 고려한다면 하루 더 사는 것과 1년 더 사는 것에 들이는 하루 평균 지출액이 절대적으로 같더라도 둘의 실질적인 가치는 다르다. 하루의 경험보다 1년의 경험이 더 많은 데다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연속성은 상당히 중요한데, 소설 한 권을 온전히 읽는 게 소설 한 챕터만 읽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20분 볼 수 있는 권리로 쪼개 판다면, 누가 그렇게 쪼개진 영화를 보려고 할까? 조각난 재화보다 하나의 온전한 재화가 우위에 있듯이 마지막으로 살 하루보다 마지막으로 살 1년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에 대한 선호가 그렇듯, 수명에 대한 선호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시한부 인생임에도 어떤 식으로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가온 죽음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1,000년 사는 동안 겪을 온갖 경험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설령 신체 나이가 젊지 않더라도 무조건 오래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노화로 인해 몸이 고통스러워도 1,000년 동안 수많은 만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소설, 음악, 스포츠 경기, 정치변동, 환경변화, 기타 등등을 즐기고 섭렵하는 데에 느끼는 기쁨이 앞선다면 장생에 따르는 노화라는 대가를 충분히 치를 만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N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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